바그너의 명작은 주로 인생의 격동기에 탄생했다. 그에게는 사랑도 파란만장한 삶과 뜨거운 열정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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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바그너의 오페라만을 집중적으로 공연하는 국제적인 음악축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페라 공연 입장권은 매우 비싼데다가 일찌감치 예약하지 않으면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음악축제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그너 자신이었는데, 그도 생전에 이 페스티발이 이토록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인기 있는 음악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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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로이트 축제가 바그너가 타계한 다음에도 체계적으로 더욱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였던 코지마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녀는 20년에 걸쳐 바그너의 모든 작품을 바그너가 의도했던 그대로 무대에 올려 바이로이트를 명실공히 바그너 오페라의 성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피아노의 황제 리스트의 딸 코지마는 뜨거운 심장을 지닌 여인이었다.
뜨거운 심장에서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
‘뜨거운 심장’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바그너(1813-1883)야 말로 정말 뜨거운 심장의 음악가였다. 사실 서양 음악사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가들 중에서 바그너만큼 뜨거운 심장을 갖고 살아간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심장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던 열정의 불꽃은 어떤 형태로든지 외부를 향해 폭발해 나갔는데 그 불꽃은 음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뿐 아니라 시, 문학, 철학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최상의 것을 도출해 내어 전통 오페라와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종합예술로서의 음악극을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존의 오페라처럼 한 시대의 단면을 극의 소재로 다루는 것은 인간전체를 표현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옛 전설이나 신화 속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모습이 녹아져 있으므로 극의 소재는 신화나 전설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의 손에 의해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전역의 신화와 전설들을 소재로 하는 음악극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우아하고 고대 로마의 건축처럼 장엄하며, 또 낭만적이며 환상적인 동시에 미래 지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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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오페라의 전당 페스트슈필하우스(Festspielhaus)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만을 공연할 수 있는 곳으로 바이로이트를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꼽았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바이로이트에 이미 오페라 극장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시 바이로이트는 저작권이 저촉 되지 않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작품 저작권을 모조리 팔아치운상태였다. 셋째는 바이로이트는 이렇다 할 특별한 문화 도시가 아니어서 자신의 작품만을 전적으로 공연하는 곳으로 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오페라 극장이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라서 극장의 규모나 구조가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만 공연할 새로운 극장을 세우려고 빚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후원을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가 전적으로 후원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루드비히 2세는 어릴 때 <로엔그린>을 보고나서부터는 바그너의 마력에 완전히 빠져들었으며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바그너의 막강한 후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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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음향을 고려하여 구석구석목재를 사용했던 것이다. 또 무대는 넓고 깊으며, 관객석은 로얄 박스가 따로 없는 고대 그리스의 반원형극장 형태이다.
드디어 1876년 8월, 이곳에서 개막공연으로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편이 초연되었다. 13일에 <라인의 황금>이 공연되었을 때는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1세와 브라질의 왕 돈 페드로 1세를 비롯 수많은 귀빈들과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루드비히 2세는 리허설까지도 지켜봤다.
계속해서 14일에는 <발퀴레>, 16일에는 <지크프리트>, 17일에는 <신들의 황혼>이 순조롭게 공연되었다. 이리하여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아성으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으며, 이때 처음 시작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후 1882년 7월 26일에는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이 초연되었는데 자그마치 16회나 계속 공연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만족한 바그너는 오래간만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뜨거운 심장의 사나이 바그너는 아이러니하게도 심장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두 달 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자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휴양차 내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의 마지막 행로였다. 이듬해 2월 13일, 70년 동안 그의 육체를 지탱해왔던 심장이 멈추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유해가 바이로이트로 옮겨졌을 때 바이로이트 시내에는 검은 조기를 달지 않은 집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속에서 그의 유해는 반프리트 저택의 뜰에 안장되었다.
영원한 사랑 코지마와의 만남
바그너의 생애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안일한 시기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는 끝없이 역경과 부딪히고 방랑하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스스로 개발해 나갔다.
그의 명작은 주로 이러한 인생의 격동기에 탄생했다. 그에게는 사랑도 파란만장한 삶과 뜨거운 열정의 결실이었다. 바그너와 코지마의 만남은 그가 44살 때인 1857년 취리히에서 시작된다.
당시 코지마는 20살의 열정과 지성을 갖춘 갓 결혼한 신부였고 그녀의 남편은 바그너의 음악을 예찬하던 유명한 젊은 지휘자 한스 폰 뷜로(1830-1894)로 리스트의 총애를 크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바그너는 그만 코지마와 눈이 맞아 불륜의 관계에 빠졌고, 마침내 57세가 되던 해에는 33세의 코지마와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들의 뜨거운 심장 속으로부터 타오르던 불길 앞에서는 당시 어떠한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그너의 작품 속에는 ‘구원’이라는 테마가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어떤 때는 종교에 의한 구원으로, 어떤 때는 사랑에 의한 구원으로 나타난다. 코지마는 인간적으로 표류하고 있던 바그너를 사랑으로 구원해낸 여인이었다. 바그너보다 수십 년을 더 살았던 그녀는 1930년에 그의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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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복케리니는 이 부분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기타처럼 무릎에 올려놓고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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